1. 1979년 가을, 무엇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혼란과 위기의 징후들)
1979년 대한민국은 겉으로는 고도성장을 이루고 있었지만, 안으로는 체제 내부의 긴장과 균열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전히 강한 통치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주변에서는 **권력 내 갈등**, **사회 불안**, 그리고 **반유신 여론의 확산**이 중첩되고 있었다.
- 부마민주항쟁(10월 16일~20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 발생
- 정치권의 분열: 여당 내에서도 유신체제에 대한 피로감 증대
- 경제 악화: 오일쇼크 여파, 물가 상승, 실업 증가
이러한 위기 국면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권 유지냐, 체제 전환이냐**를 놓고 치열한 내부 논의를 진행하던 상황이었다.
2. 피격 사건의 발생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45분, 서울 중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열린 조촐한 만찬 자리. 그 자리에 있었던 인물들은:
- 박정희 대통령
- 차지철 대통령 경호실장
-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 박선호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외 몇 명
그날 김재규 부장은 돌연 권총을 꺼내 차지철 실장을 먼저 사살하고, 곧이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발사한다. 박 대통령은 즉사했고, 이후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1].
3. 김재규는 왜 대통령을 쏘았는가? (진술과 해석의 충돌)
사건 직후 김재규는 "유신 독재를 끝내기 위해 결단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극명하게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 정치적 동기설: 김재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민주화를 위한 의거를 했다고 주장
- 권력투쟁설: 차지철과의 권한 충돌, 박정희의 신임 상실로 인한 자의적 행동
- 개인 감정설: 궁정동 회의에서 박 대통령이 김재규를 면박 주자 격분하여 계획 실행
재판에서는 **내란 목적 살인죄**로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김재규는 **1980년 5월 24일 사형 집행**되었다[2].
4. 국가적 충격과 권력 공백 (자유민주 체제의 갈림길)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는 국가 전반에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정부는 급히 국무총리 **최규하**를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지정하였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은 것은 전환이 아닌 군부 권력의 재등장이었다. 1980년 5월,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실권을 장악하며 **5·17 쿠데타**로 이어진다.
즉, 10·26 사건은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로 바로 전환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친 분기점**으로 평가되기도 한다[3].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의 쿠데타가 없었다면, 이 나라는 지금쯤 공산화 되었을 수 있다. 또한 민주주의는 두가지의 민주주의가 있으며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 전제주의로 적화통일 시키기 위한 북한의 적화통일 공작으로 많은 대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외치었지만, 반대로 민주주의 운동이 아닌 5.18 같은 내란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어면히 반란이며, 내란이었고 경찰과 군인을 학살하고, 일반 시민들도 함께 휘말리게 하여 많은 희생을 치루게 한 사건이며, 그것은 지금의 북한에서 민주혁명이라 가르치며, 이 일에 북한이 개입되어있는 정황이 지금은 명백히 들어나 있으나, 이것을 성역화한 종북 좌익 세력들로 인해 대한민국은 비극 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박정희 대통령으로 인해 강하고, 자유롭고, 경쟁력 있는 국가로 성장하였으나. 반공 정신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왜곡된 역사를 배우며 지금의 대한민국이 자유민주 체제가 아닌 이미 사회민주주의의 잠식되어 이 나라는 지금 위기에 놓여져 있다고 본다.
5.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남긴 것
박정희 대통령은 18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었고,
그 시대는 고도성장, 자립경제, 반공체제 확립의 시기였다
📚 주석 및 참고자료
- [1] 국가기록원, 「10·26 사건 관련 정부 비상조치 문서」, 1979.
- [2] 정해구, 『한국 현대정치사 연구』, 나남출판, 2005.
- [3] 김영호, 「10·26 이후 민주화 이행 경로에 대한 평가」, 한국정치연구, 2007.